추천서 요청
이번에는 추천서 관련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학생 입장에서는 부탁하는 것이 부담이 많이 될 것이고, 그건 저도 학생이었던 적이 있으니 아주 공감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추천서를 쓰는 입장에서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되는지 한번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사실 한국에서는 "추천서 문화"라고 하는 것이 강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국내에서는 추천서라는 것을 블라인드로 인해서 절차상 허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장학금 등과 관련해서 추천서를 받더라도 형식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 많은 경우 피추천인이 제출하도록 하니 추천서 내용을 피추천인이 볼 수 있게 되어 있음...) 그래도 가끔씩 국내 상황에서도 필요할 때가 있고, 만약 유학을 준비한다고 하면 추천서가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종종 학생들에게서 추천서 요청을 받습니다. 그 과정에서 반복해서 느끼는 지점들이 몇 가지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중에서 세 가지 정도만 적어 보려고 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경험이고 교수님들끼리 추천서 써주는 경험을 서로 엄청 공유하거나 하진 않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케바케 교바교라고 봐야겠죠. 그래도 제 기준에서 추천서를 부탁해야 하는 상황일 때 염두에 두면 좋을 점을 정리해 봅니다.
1. 너무 늦게 연락을 주는 경우
첫 번째는, 생각보다 정말 많이 보게 되는 패턴인데, 너무 늦게 연락을 주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유학 지원을 생각해 보면, 미국 박사과정 기준으로 12월 1일을 시작으로 12월 중에 추천서 마감이 몰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11월 중순이나 11월 말에 처음 연락을 주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건 사실 좀 늦은 편이죠. 물론 살다 보면 일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고, "원래는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기회가 생겨서 지원을 해보고 싶어졌다" 같은 상황도 있을 수 있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건 예외적인 상황인 것이고, 12월에 추천서를 받겠다 하면 10월에는 연락을 주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추천서 내용과 관련해서는 아래에 더 쓸텐데, 일단 너무 데드라인에 임박해서 처음 연락을 받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기 때문에 이게 첫번째입니다.
2. 본인 일인데 준비나 팔로우업이 안 되는 경우
두 번째는, 본인 일인데 준비나 팔로우업을 잘 안 하는 유형입니다. 먼저 추천서를 부탁할 때는 본인이 추천 받을 내용과 관련된 정보를 CV로 정리를 하고, 또 연구계획서 (Research Statement or State of Purpose) 등과 같은 관련 서류를 정리해서 줘야 하는데 여기 정리부터 잘 안 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추천서를 부탁한 뒤에도 생각보다 챙겨야 할 것이 많습니다. 학교별 데드라인은 언제인지 혹시 추천인이 제출을 안한 학교는 없는지 등을 계속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오히려 제가 먼저 "혹시 이번에 지원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마감이 지금 즈음인 것 같은데 어떻게 됐나요?"라고 묻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투두리스트로 해야할 일을 관리를 하니, 제가 오히려 신경 쓰여서 먼저 연락을 하게 되는 경우인 것이지요. 추천서를 써주는 사람 입장에서 "혹시 추천서 필요했던 거 아니었냐"라고 챙겨야 하는 상황은, 솔직히 좀 답답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류 목록 중 하나가 추천서인 것이지, 전체 지원 패키지는 결국 본인이라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야합니다.
실무적인 차원에서는,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을 챙겨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어느 프로그램/학교에 언제까지 추천서가 들어가야 하는지 엑셀/구글시트 등으로 정리
- 추천인에게 처음 메일을 보낼 때, CV, 에세이, 학교 목록, 마감일 등 필요 정보를 정리해서 보내기
- 마감 전에 제출이 안 되었다면 리마인드 메일 보내기
이 정도만 해도 추천서를 쓰는 입장에서는 훨씬 편해집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이 프로세스를 관리를 하고 있구나"라는 인상을 남기는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3. 추천서 내용
마지막으로 어쨌든 추천서를 받는 과정이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추천서에 쓰여질 내용이죠. 그러한 측면에서 "이 사람이 나에 대해 좋은 추천서를 써줄 수 있는 사람인가?"를 한 번쯤 생각해 보고 부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많은 경우 추천인을 고를 수 있을 정도로 숫자가 많은 것은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혹시 내가 언젠가 추천서를 부탁할 수도 있겠다 싶은 교수님과는 되도록 일찍부터 소통을 시작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수업을 듣는 중이라면 찾아가서 얘기를 나누기에 아주 좋은 핑계가 되는거죠. 예를 들어 유학을 준비하는 생각이 강한 경우에는 최소한 1년 전부터는 해당 교수의 수업을 듣든 아니면 그냥 연락해서 찾아가서 얘기를 하든 뭔가 쓸 거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없는 얘기를 쓸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아는 한 대놓고 안 좋은 이야기를 추천서에 쓰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없다고는 안 함 ㅎㅎ) 최소한 저는 안 좋은 얘기를 쓸 바에는 추천서를 써주기 어렵겠다고 시작부터 거절을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추천서는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쓰입니다. 이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긍정적인 분위기의 글 속에 얼마나 진짜 열정이 녹아 있는가, 행간에서 얼마나 강한 지지가 느껴지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Strong letter와 polite letter의 차이 같은겁니다. 문장만 보면 다 괜찮아 보이지만, 읽다 보면 "이 사람은 그냥 예의상 쓰는 것 같다"라는 느낌이 나는 추천서들이 있습니다.
교수 입장에서는 (최소한 저는) 나이를 점점 먹어가면서 더욱더 "내 다음 세대의 학자가 잘 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큰 기쁨과 보람과 동력이 됩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정말 제가 더 잘 되는 것보다 제 학생이나 제가 추천해준 학생이 1인분 역할을 하면서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 훨씬 더 큰 기쁨이 될 것 같습니다. (아직은 아님 ㅎㅎ) 제가 지도하고 도와주고 했던 학생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좋은 연구를 하고, 좋은 동료와 함께 일하고, 본인이 원하는 커리어를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가장 오랫동안 가슴에 뿌듯함으로 남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정말 잘 될 싹이 보이는 학생에게는, 저도 제가 가진 유무형 자산을 다 끌어모아서 더 잘 되도록 돕고 싶고, 추천서를 쓸 때도 더 힘을 실어서 쓰게 됩니다. 그 순간만큼은 사실 저도 일종의 세일즈를 하는거죠. 이 학생이 왜 좋은 투자이고, 왜 여기에서 꼭 데려가야 하는 사람인지 설득하는 작업인거죠.
그렇게 보면 추천서를 쓰는 사람 입장에서도 나름의 리스크가 있습니다. 제가 추천서를 허투루 쓰거나, 사실과 다르게 과장해서 쓰거나, 제가 강하게 밀었던 학생이 가서 완전히 망쳐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제 추천서의 크레딧이 점점 작동하지 않게 되겠죠. "저 사람이 추천하면 믿을 만하다"라는 것이 추천서의 핵심이거든요. 그래서 저도 되도록이면 제가 진심으로 추천할 수 있는 경우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또 책임감을 가지고 쓰려고 노력합니다. 정말 추천하고 싶은 학생에게는, 저도 글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온갖 좋은 표현들이 떠오릅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학생이었을 때보다 훨씬 잘한다"라든지, "최근 몇 년간 가르친 학생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학생 중 한 명이다" 같은 이야기들을 실제로 쓰게 됩니다. 이런 문장들은 형식적으로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게 느끼지 않으면 손이 잘 안 나가는 표현이거든요.
어쨌든 정리하자면 추천서를 요청한다는 건 결국 "나라는 사람에 대해 다른 사람이 책임감을 가지고 글을 써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만큼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관계를 쌓고, 과정 전체를 스스로 챙기고, 이분이 나를 진심으로 추천하고 싶은 사람으로 어떻게 만들 것인지 등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